어떻게 참아볼 수는 있을 것 같은 존재의 가벼움
오래된 오르간 소리, 하늘을 걸어다니는 다리
한 사람이 품고 있는 여러 사건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하지만 출생과 사망, 입학과 졸업, 입사와 퇴사, 결혼과 이혼처럼 제도의 장부에 기록될 것을 강요받는 일들이 아닌 이상 그 시작과 끝이란 대부분 정하기 나름이다. 이를테면 사랑의 시작이란 언제부터인가? 상대방을 처음 본 순간, 혹은 무심한 대화 속에서 미세한 떨림을 느낀 순간, 혹은 고백이 받아들여지는 순간? 어느 쪽을 시작으로 잡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 사랑이 끝나는 건? 언젠가 있을 이별을 처음 예감하게 되는 순간, 혹은 헤어지기로 합의하는 순간, 혹은 그 뒤로도 한참을 앓다가 비로소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자유로워지는 순간? 역시 어느 쪽을 끝으로 잡아도 된다. 사건이란 애초에 그런 것이다. 내가 만드는 시작과 내가 만드는 끝이 있을 뿐이고, 그걸 이리저리 구상해 보는 것은 썩 재미있는 일이다. 이건 삶에서 퍽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4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의 패턴 속에서도 수많은 시작을 열고 수많은 끝을 닫았다. 새로운 집, 새로운 회사, 새로운 관계 속에서 많은 것들이 피고 또 졌다. 그러는 동안 나는 세면대의 하수구를 뚫는 법을 배웠고, 옷가게에서 혼자서 옷을 고를 수 있게 되었으며, 술을 먹고 여기저기 전화하는 버릇은 거의 버렸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혹은 무언가에 공존하는 좋은 점과 싫은 점을 조금 더 정확하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시작과 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닐까. 이건 내 삶에서 퍽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이제는 ‘카스테라’라는 다소 민망한 닉네임도 조금 낯설어져 버렸다. 내가 이 이름으로 이 공간에 다시 무언가를 쓴다는 게 나에게, 그리고 이 글을 보는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순 없다. 블로그를 열거나 닫는, 그러니까 물리적인 시작과 끝의 문제라면 그런 식의 의미 부여가 굉장히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안 하려고 한다. 가끔씩 비공개로 돌려 둔 옛 글을 볼 때면, 그 감정의 얄팍함에는 혀를 내두르게 되면서도, 어쨌거나 그런 감정이나마 가장 열심히 기록하고 표현해 왔던 시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무수한 시작과 끝으로 구축되는 삶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내 삶에서 절대 들어낼 수 없는 공간이었고, 그렇기에 지금 쓰는 이 글이 올라갈 곳도 바로 여기여야만 했다. 이건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내가 과연 '돌아온' 것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일주일 뒤에 또 글을 남길지, 한 달 뒤에 또 글을 남길지, 아니면 며칠 뒤에 이 글도 사라질지. 오랜만의 포스팅이지만 이것은 어떠한 그리움에 대한 표현도 아니고, 스타플레이어의 화려한 복귀전도 아니며, “억압되었던 것은 언젠가 귀환한다”라는 정신분석의 명제로 확대 해석될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글을 그것의 제자리라고 생각되는 곳에 위치시킬 뿐이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감정에 충실하게, 그렇게 걸으련다……. 아! 오랜만에 포스팅 창에 글을 쓰려니, 이상하게 무게 잡게 되고 어색하고 어정쩡해져 버려서 현실에서 내가 좀 더 담백한 사람이 되었다는 걸 증명할 길 없어 원통하다. 그런데 이건 내가 내 삶에서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다.



by 카스테라 | 2012/12/06 22:24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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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12/12/07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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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12/12/07 17:0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12/12/07 19:2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치니 at 2012/12/08 20:09
오오오, 기다렸다고요! 보람 돋네요.
닫다니요, 아니 될 말씀! 또,또, 올려주세요.
Commented by 윤종대 at 2013/01/10 08:49
확실히 담백해졌네
Commented by 고소 at 2013/01/29 13:22
글이 충분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ㅎ 자주 뵈었으면 합니다, 긴 글로요. ㅎ
Commented by 규  at 2013/02/01 00:43
저도 같은 처지가 된 듯합니다 ^^; 반가운 마음에 수줍게 댓글남겨보아요~ :)
Commented by at 2013/06/15 01:03
글이 올라온 게 생각보다 최근이라 조금 놀랐어. 어쨌든 시간은 정직하게 쌓이고 있겠지. 정직이란 단어가 와닿진 않지만 달리 대신할 말도 찾기 어렵네.
Commented at 2013/06/15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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