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참아볼 수는 있을 것 같은 존재의 가벼움
보드카를 마시고 헤어지는 새벽 다섯 시보다 더

몇 번의 연애를 겪으며 새삼 확인하게 된 것은 내가 얼마나 구제불능의 인간인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알량한 자아의 경계를 설정해 놓고(하지만 알량하기 때문에,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그만큼 절실했으리라) 그 안에 파묻혀 남자친구로서의 역할놀음을 하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물론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던 건 사실이지만, 결국 내 이기심을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었을지. 장거리 연애에선 시간적-물리적 거리와 불확실한 미래가 그 경계를 대신하는 바람에 나는 어딘지도 모를 얄팍한 틀 안에서 허둥댔고, 상대는 비겁하달 수 있는 방식으로 이별을 고했다. 어떤 연애건, 나는 사랑은 했지만 나 스스로에게 진실하지는 못했다.

스스로에게 진실하다는 건 과연 뭘까? 감정에 배반되는 솔직하지 못한 행동들을 하지 않으면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지만 그건 너무 쉬운 정의 같고 그렇게 따지자면 나로선 좀 억울하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내 감정이라는 걸 잘 모르겠고 그다지 믿지도 않기 때문이다.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지 모르겠다는 느낌과 어떤 감정이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거의 동시에 찾아와서는 생각에 감정이 끼워 맞춰지는 것 같달까. 이건 자의식이라는 걸 가지게 된 이후부터 나를 끊임없이 괴롭혀 온 일종의 콤플렉스인데, 연애 관계에서는 이게 여지도 없고 가차도 없이 드러났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해보려고 애썼던 연애들은 결국 그 콤플렉스만 강화하면서 끝맺어지곤 했다. 스스로에게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이 뼈저리게 아프면서도, 연애라는 강렬한 감정으로도 극복되지 않는 콤플렉스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절망감. 지난 연애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내 인생은 결국 이 모양 이 꼴이구나 하는 생각에 몸서리쳤다.

그리고 너를 만났다. 예쁘고 센스 있고 유머감각까지 있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따름이었지만, 더 매력적이었던 건 나와는 달리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내세워 남들을 함부로 폄하하지 않는다는 것, 자신의 상처를 과장하지도 않고 축소하지도 않으면서 담담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세계에 대한 연민과 분노를 동시에, 거기에 더해 행동할 수 있는 용기와 그것을 허투루 쓰지 않을 지혜까지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와 비슷하면서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

그래서였을까, 물론 내가 처음부터 저런 콤플렉스를 고백하진 않았지만, 그런 나이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곤혹스러움을 너는 그 자체로 너무도 잘 이해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 음험한 자아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기에 네 앞에서는 나를 애써 숨길 필요가 없었다. 단언컨대 너와의 관계에서 '다른 속내'를 품은 적이 없다. 나아가 서로를 더 깊게 알아 가면서는 내 이런 자의식의 보잘것없는 부분들에서 빛나는 것을 건져 올려 깨우쳐 주었고, 너무도 평범해서 밋밋했던 부분들을 가다듬어 멋진 굴곡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까 나는 네 덕분에, 콤플렉스를 억지로 깨는 방식이 아니라 인정하고 이해받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넌 네 일신상의 이유로 이 관계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을 때에는 정말로 용기 있고 감동적인 선택까지 해주었다. 내게는 과분한 멋진 여자다.

이런 너를 상대로 ‘경계 짓는 자의식’ 따위가 발동할 틈은 애초부터 없었다. 오히려 네가 나라는 방을 더 마음껏 들락거리고 휘저으며 마음껏 뛰놀기를 바랐다. 이러다 어느 순간 시들해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계산’조차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너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너와 함께하는 삶을 위해서라면 포기하지 못할 것, 감수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심으로.

하지만 십수 년 유지되어 온 습관은 내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나 보다. 경계 바깥의 세계가, 거기서 이루어지는 충만한 관계가 퍽 낯설었나 보다. “결국 너 상처받지 않고 안전한 범위 안에서만 나를 사랑하잖아”라고 네가 울면서 말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생각보다 훨씬 쉬운 방식으로 풀어 줄 수 있었던 너의 트라우마를 내 행복과 관념에 젖어 소홀히 했고, 그것은 과거의 부끄러운 내 모습과 닮은꼴이었다. 내 꼴같잖은 자의식을 어루만져 준 네게, 그 자의식의 못된 찌꺼기로 상처를 주면서, 네 트라우마를 오히려 더 키우고 있었다니.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 다시 한 번 하고 싶다. 하지만 하나만. 네가 그것으로 미래의 나까지 단정 짓고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내 잘못은 과거의 답습이 아니라 깔끔하게 털리지 않은 모래알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네 덕분에 지긋지긋한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한계를 돌파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더 기다리게 하지 않을 것이고, 내 어쭙잖은 자존심과 계산으로 너를 아프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노력한다기보다는 그렇게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균열의 지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동화는 끝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앞으로 한 발 더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아직 모르는 우리의 미래를. 언제나처럼 신나게 깔깔대면서, 언제까지나 함께이면서, 맞았으면 좋겠다. 사랑한다. 


by 카스테라 | 2013/07/06 06:06 | 트랙백 | 덧글(3)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rss

skin by 이글루스